2010/09/01 15:34
나/인문
페이스북에서 만난 조국 교수(법대 82학번이니까 동시대를 살았고 넓은 교양과 인간에 대한 애정, 끊임없는 고민과 실천이 돋보인다. 이렇듯 좀더 깊이있게 좋은 사람을 알게 되는 것이 페이스북의 매력인 건 분명한 듯)는 한 댓글에서 '정의론'의 역사에서 결국 롤스 이전시대와 이후 시대로 구분된다고 했다. 그만큼 롤스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라는 뜻인 것 같은데 좁은 소견인지는 모르겠지만 롤스의 설명은 개인주의 또는 자유주의 철학이 도달할 수 있는 최후의 단계라는 의미로 읽힌다. 그런데 좀 다른 것은 비록 그 근거(매킨타이어의 인간에 대한 '서사적 존재' 정의)가 다소 빈약(?)해 보이는 느낌은 있으나 결국 샌델 교수는 자유주의의 한계를 논하고 있고 결국 그것은 롤스의 한계를 말하고 있다. 문제는 롤스의 대안이 무엇인가, 자유주의 철학의 대안이 무엇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아래의 두 블로거, 진중권, 이택광 교수의 롤스 비판은 그와 같은 맥락에 있다. 조선일보 등의 논지를 보더라도 서구 기준에 우파 보수주의라 할 수 있는 샌델을 진보진영에서 환영하는 거 가체가 모순적이라는 이야기도 이와 유사하다.
위 두분의 논지는 결국 '자유주의'의 입장, 롤스의 입장에서 본 샌델의 공동체주의 비판이다. 이택광 교수가 "지금 한국의 국면에서 본다면 샌델보다 차라리 롤즈를 읽는 게 더 '진보적 독서'"라고 주장하는 데서 이러한 사실은 분명해 진다.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적 진보'의 입장에 선 분들이 볼 때 한국 사회는 한번도 서구식 자유주의가 또는 자유주의적 사회주의가 꽃피운적이 없다. 그리고 이는 분명 사실이다. 부르즈와 자유주의와 대척점에 서고자한 마르크스를 높이 평가한다고 하더라도 변증법적 대척점(정)의 역사 경험이 없는 진보 또는 사회주의(반)의 노력도 일정 왜곡 또는 굴절될 수 밖에 없는 것이 한국의 현실인 것도 인정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볼때 소련을 비롯한 동구 사회주의는 분명 마르크스의 적자다(아니라고 많은 사람들이 강변하지만 현실은 현실). '공동체주의'와 유사한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은 자유주의자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자유로울 것이다. 아이러니칼 하게도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은 자유주의자들의 시각에서는 전체주의이기도 하면서 '전통 보수주의'의 낙인이 이상할 것도 없다. 자유와 인권이 말살되었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자본주의에게 패배한 사회주의를 더이상 논할 필요가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인류 역사 발전에 있어서, 그것을 인권이나 자유의 신장이라는 개인주의적 개념으로 설명한다고 할지라도 자유주의는 충분한 역사적 공헌을 한 이데올로기이다. 북한,중국을 포함한 사회주의 진영 전체에서 그 축복을 받지 못해 온 것도 사실이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던 해 숨을 거두면서 하이예크가 얘기했다는 말 '거봐, 내가 모라고 했어, 결국 자유주의/자본주의가 승리했잖아?!' 어쨌든 인간의 발전을 생산력의 발전으로 보던 자기 결정의 자유의 극대화로 보던 이 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 이상의 축복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현대의 문제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이 아니다. '자유주의'의 전일적 지배가 낳은, 물론 한국사회와 같이 왜곡되고 정치적으로 낙후된 나라의 자유주의가 제대로 꽃피고 있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국제금융자본의 창궐로 표현되는 현대 사회의 만악의 근원이 무엇인가? 그것은 아무리 모라해도, '자유 지상주의'와 롤스의 자유주의가 아무리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라도 강변하더라도 자유주의 그 자체이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자유주의'는 현실을 외면한 도그마일 뿐이다. 신자유주의는 '따뜻한 자유주의',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가 아니다 라고 주장하더라도 그 철학적 프레임과 패러다임은 달라지지 않는다. 자본의 탐욕, 지배계급의 인간에 대한 배타성, 인류의 지구 환경에 대한 강도적 약탈에 대해 어떻게 자유주의가 자유로울 수 있는가?
매킨타이어나 샌델의 공동체주의가 근본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을 '자발적 존재'가 아닌 '서사적 존재'로 본다거나 공동체의 미덕으로 정의에 대한 사회적 합의 도출이 중요하다는 방법론 등을 보면 그들의 진지한 고민과 성찰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주의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전제로 하지 않는한 이 고민이 달갑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다. 이택광 교수가 말했듯 샌델의 '공동체주의'를 얼마든지 악용할 수 있는 지배계급의 존재가 상존하는 한 그 우려는 충분히 근거가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철학을 하고 사회의 인간적 발전을 갈구하는 본질적인 '혁명가'들이 그 화두를 놓아 버릴 수 있는 변명은 되지 않는다.
얼마전 부터 한 무명의 블로거를 알게 되면서 자유주의를 더 생각해 보았다.(http://bangmo.wordpress.com/) 그 분은 '북한'에 대한 반발감이 대단하고, 천안함 사건도 분명 북한의 소행이라고 확신하며, 섣부른 자유주의자 들의 무식을 타박하곤 한다. 진중권 같은 자유주의도 있지만 이런 자유주의가 현실에서는 더 많지 않을까? 그 블로그의 대문에 이렇게 쓰여 있다. '개인으로 살든가 혹은 죽든가, With Individuality or on the Shield.'
무엇이, 어떤 철학과 이데올로기, 세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이 작금의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자유주의가 그 대안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현실외면이다. 자유주의 축복을 제대로 받아보지도 못한 사람들에게 자유주의를 극복하자고 하니 이 또한 안타까울 수 밖에 없다. 근대화가 늦었고, 식민지 통치도 받았고, 연이어 분단되었고,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나라에서 태어나고 사는 사람들의 비애일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매우 보수주의자 일 것 같다. 난 어려서 자랄 때 마음속 깊이 공감하고 따랐던 이데올로기(?)가 있다. '신체발부는 수지부모(한자생략, 무식 아니 게으름의소치)' 라는 말이다. 나에게 있어 내 몸뚱아리와 나의 역사는 나만의 역사가 아니며 내 맘대로 결단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것이 전체주의이고 반자유주의라고 비판받겠지만 나는 이것이 나쁘다고도 틀렸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가족을 넘어 서로 공감하고 연대하고 남의 아픔을 남의 것으로 치부하지 않는 생각의 원천이기도 하다. 이런 공감과 연대의 정신이 없이 민중의 문제, 빈곤의 문제, 세계화의 문제, 자유지상주의,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 등등의 철학적 뿌리와 어떻게 대결할 수 있을까? 단견이겠지만 살면서 이 생각은 점점 더 확고해 진다.
주제와 좀 다르긴 하지만 마이클 샌델교수의 TED 강연이 눈에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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